다음은 김창환님이 브랜든 그린에게 보낸, PD가 바라보는 좋은 CD는 무엇인지 고민하여 '더 나은 CD가 되는 방법'이란 제목의 긴 메일의 내용이다.
CD는 비전을 만드는 사람이다.
CD는 제품의 비전을 제시하고 만드는 사람이다. 비전은 곧 제품의 가치를 정의하는 것이다. CD는 이 비전을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설득하며 현실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비전이 실제 제품이라는 결과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단지 추상적인 말과 글, 이미지 등으로 모든게 표현된다.
따라서 비전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게 된다. 이것을 꾸준한 노력을 통해 일치하게 만들고,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비전을 현실화하는 것이 CD의 역할이다. 이런 과정에서 비전의 문구는 점차 구체화되고 수정 보완되며 진화한다.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비전을 구현하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설득의 방법은 CD스스로 찾아야 한다.
비전이 현실화되어 실제 제품으로 탄생하기 위해선 실제로 비전을 구현하는 사람들이 그 비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비전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를 하는 게 CD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그 방법으로 모든 CD는 저마다의 방법을 고안해낸다. 일반적으로는 작은 성공을 쌓아서 신뢰를 얻는 과정을 거친다.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서 점차 신뢰를 쌓아갈 수도 있고, 과거의 성공에 기대 더 큰 비전을 설득하는 과정을 추구할 수도 있다.
비전을 현실화하는 과정에는 잘못된 비전은 스스로 수정해야 한다
비전은 아직 결과물이 없는 상태에서 미래를 놓고 그린 추상적 가치다. 그 때문에 틀릴 수 있다. 모든 팀원이 비전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는지 개발 과정에서 작은 검증 과정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직접 개발을 경험하고 세부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설명 없이 비전을 바꾸면 일관성 없는 사람이 된다. 일관성 없는 CD는 신뢰를 쌓을 수 없다.
비전은 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추상적인 문구는 필연적으로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이 모호함을 줄이고 구체적인 기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제안은 '리얼하지 않기 때문에' 비전에 맞지 않고, 어떤 제안은 게임이기 때문에 '리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직원들은 기준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 CD는 제품에서 리얼함의 기준과 게임이기에 허용되는 범위를 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례 하나하나마다 기준을 바꾼다면 비전의 모호함은 커질 것이다.
아이디어는 비전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아이디어를 비전으로 착각한다. 사실 아이디어는 비전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아이디어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모든 개발자와 게이머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이 중에 좋은 아이디어가 비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아이디어도 단지 아이디어일 뿐이다. 아이디어는 구체적인 것이고, 비전은 전체적인 제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CD는 스스로, 혹은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아이디어 가운데 실제로 비전에 맞고, 현실적으로 구현이 가능하며, 중요도가 높은 아이디어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PD를 포함한 많은 팀원이 CD에게 아이디어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이유다.
반대로 CD가 직접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경우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CD가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CD가 제안하는 아이디어는 그 비전에 매우 적합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지 못한 아이디어를 CD가 직접 제안하는 일은 많아지면 CD의 비전 자체를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설사 어떤 비전이 하나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아이디어와 비전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좋은 CD가 될 수 없다. 그는 단지 우연히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실행한 사람이 될 뿐이다.
아이디어와 디자인, 구현에 대하여
비전이 제품으로 현실화되려면 수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이 아이디어들은 디자인과 구현 단계를 거쳐서 최종적인 결과물이 된다. 많은 경우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실제 구현이 되고 난 이후에 유저들의 반응을 받아야 확실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과정은 다시 작은 단계로 쪼개져서 반복 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고객 테스트를 포함한 반복 작업을 통해 비전과 아이디어, 디자인, 구현을 전체적으로 점점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제품을 완성한다. 모든 제품은 장인에 의해 구현된다. 그것은 프로그래밍 코드나 그래픽 애셋, 밸런스 데이터 형태를 띠는데, 이런 것들은 직접 만지고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장인의 특성을 지닌다. 이 장인들은 조금씩 결과물을 만들고, 이를 테스트하고 튜닝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내게 된다.
아이디어는 구현 단계를 거치기 전에 설계 단계를 거쳐야 한다. 설계는 수많은 아이디어 또는 제품 특징들 간 상관관계를 고려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구조화하는 과정이다. 현실에서 아이디어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고, 많은 개발자는 스스로 어떤 영역을 구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우 복잡한 물건을 전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희귀한 자원이다. 설계 능력은 겉보기론 잘 알아볼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이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만드는 일 또한 CD의 중요한 역할이다.
나와 제품의 분리가 필요하다(동일시의 위험성)
CD와 PD가 잘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제품과 자신을 같은 것이라 믿는 것이다. 동일시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제품에 대한 자기 투영은 때로는 매우 높은 열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대체로 종국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품에 대한 자기 동일시의 부정적인 점을 얘기해보자면, 제품에 대한 비난을 자기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것, 제품을 개인 소유물로 간주하는 것, 결국 제품이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나아갈 때 큰 상실감에 빠지는 것이 있다.
CD는 자기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 그리고 제품, 이 세가지를 구분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3가지를 분리해 대할 수 있어야 모두가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제품이 온전히 고객 것이 되면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어떤 CD가 될 것인가?
CD로 일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내야 한다. 일단 CD로 일을 잘하기 전에 전제 조건이 있다. '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CD로 일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전 단계이자 전제 조건이다.
비전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다음 단계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비전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이를 설득하고, 이 비전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비전에 맞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필요하다.
게임 개발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들은 구현 업무를 시작으로 설계를 하고, 어떤 분야의 책임자가 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런 경우 본인이 특정한 구현/설계 업무를 잘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비전을 설득하고 팀의 신뢰를 얻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다. 특히 '장인'들은 자신보다 제품 구현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 김창한은 프로그래머 출신이기에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이런 경우 대체로 아티스트 직군은 내 의견을 신뢰하지 않는다. CD는 이런 환경에서 2가지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먼저 자신의 비전을 어떤 방법으로 설득하고 신뢰를 쌓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르 ㄹ해내기 위한 방법은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비판은 쉽고 만드는 건 어렵다
비판은 아이디어와 마찬가리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매우 쉬운 일이다. 어떤 제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인터넷을 보자.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비판의 글을 쏟아낸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비판하는 제품의 반에 반만 한 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비판은 쉽고 만들어 내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쉬운 일을 하는 사람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CD는 비판자보다는 창조에 기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평가나 비판은 CD가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이 대신해줄 수 있다. CD는 그 비판을 함께 들어주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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